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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네트워크] 첫 흑인 여성 대법관 지명자

 커탄지 브라운 잭슨. 이변이 없는 한 연방 대법원 233년 역사상 첫 흑인 여성 대법관이 될 인물이다. 서아프리카 언어로 ‘사랑스러운 자’라는 의미의 ‘커탄지’. 최고 권위의  대법원이 한층 더 다양해질 것을 예고하고 있다.   연방 상원 법사위원회는 나흘간 청문회를 열며 현직 워싱턴DC 연방 항소법원 판사인 잭슨 지명자를  샅샅이 검증했다. 청문회를 지켜보며 그녀의 경력에 감명 받고 인성에 감동했다.     미국 역사의 한 획을 긋게 될 커탄지 브라운 잭슨은 누구인가.   우선 가족관계가 뜻밖이다. 그녀는 미국 백인 상류층으로 알려진 일명 ‘보스턴 브라민’ 가문의 며느리다. 대학 시절 만난 결혼 25년차 남편이자 워싱턴 한 대학병원 소화기외과 의사 패트릭 잭슨은 자타가 인정하는 보스턴 브라민 출신이다.     신분제가 의미 없는 시대이지만 매사추세츠주 보스턴을 지역 기반으로 둔 명문가 중 명문가의 후손이다. 6대에 걸쳐 빠짐없이 하버드대를 나온 것으로 알려졌으며 쌍둥이인 윌리엄 잭슨의 아내는 2015년 미국 역사상 최연소 하원의장으로 선출됐던 폴 라이언 전 의원의 아내와 친자매 사이이다. 말 그대로 뼈대 있는 가문이다.     깔끔한 양복 차림으로 지명자 뒤에 앉은 패트릭 잭슨은 청문회 내내 툭하면 눈물을 닦아냈다. 그 옆에는 감격에 겨워 코가 빨개진 아빠를 창피하다는 듯이 바라보는 두 딸이 있었다. 이 범상치 않은 가족의 평범한 모습이 보는 이들을 흐뭇하게 했다.   그간의 경력도 흠잡을 게 없다. 잭슨 판사의 검증을 위해 판사와 변호사 250명을 직접 비공개 인터뷰했다는 미국 변호사협회와 그녀를 지지하는 지인·동료·친구들의 증언을 듣다 보면 어떻게 한 사람이 이리도 바르고 열심히 살았을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마이애미의 한 고등학교 토론반에서 보여준 당찬 모습부터 하버드대 학부와 로스쿨을 다니며 이룬 성과, 변호사로 판사로 재직하며 소신 있고 성실하게 쌓아 온 경력 모두 놀라울 정도다.   잭슨이 단지 흑인 여성이라는 사실만으로 연방 대법관에 지명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바이든 대통령이 선거 기간 동안 미국의 첫 흑인 여성 대법관을 지명하겠다는 공약이 제대로 실천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현재 미국 사회에서는 소수계 우대 정책인 어퍼머티브 액션(affirmative action)을 점진적으로 폐기하자는 논쟁이 달아오르고 있다.     지금 한국에서도 성별에 따른 우대정책과 능력주의 논란이 뜨겁다. 인종·문화·성별 논쟁을 넘어서 성실하고 실력 있는 한국의 ‘커탄지’가 등장하는 날을 기대한다.  안착히 / 한국 중앙일보 글로벌협력팀장J네트워크 대법관 지명자 여성 대법관 잭슨 지명자 잭슨 판사

2022-03-28

'첫 히스패닉계 아니야' 대법관 지명 소토마요르

미국에서 대표적인 법률가이자 연방최고재판소 사상 두 번째 유대인 판사인 벤자민 카르도소가 히스패닉계였을까. 26일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히스패닉계 여성인 소니아 소토마요르(사진) 제2순회 항소법원 판사를 대법관 후보로 지명한 가운데 카르도소의 혈통에 관한 논란이 새삼 주목받고 있다. 소토마요르 판사가 대법관직에 오를 경우 히스패닉계로는 미국 최초로 대법관직에 오르는 인물이 되지만 일각에서 이를 부정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논란이 거세지자 연방사법센터는 홈페이지를 통해 카르도소가 히스패닉계가 아니라고 밝혔지만 진실은 여전히 미궁에 빠져 있다. 1932년 허버트 후버 전 대통령에 의해 대법관으로 지명된 카르도소는 포르투갈 혈통을 지닌 세파디 유대인으로 알려져 있다. 카르도소의 전기작가인 앤드루 카우프만 하버드대 교수는 카르도소의 조상이 1700년대 영국과 네덜란드에서 미국 식민지로 건너왔지만 이들의 뿌리가 어디서 비롯됐는지는 아무도 확실히 알지 못한다고 설명했다. 카우프만 교수는 그가 자신의 혈통을 자랑스러워했지만 아마 자신이 히스패닉계인지 생각할 기회를 갖진 못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뉴욕 예시바대 벤자민 카르도소 로스쿨의 마이클 헤르츠 부학장은 카르도소가 '민족 지명'됐을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했다.당시 대법원은 유대인석 가톨릭석 지역석 등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유대인 판사에는 이미 루이스 브랜다이스 대법관이 있었다. 후버 전 대통령과 상원이 카르도소를 만장일치로 임명한 것은 그가 히스패닉계였기때문이라는 점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헤르츠 부학장은 "카르도소가 첫 히스패닉계 판사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많은 히스패닉인들 뿐 아니라 예시바대 학생들도 놀라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2009-05-27

첫 라티노 대법관 소토마요르는 누구?

백악관 이스트룸을 가득 메운 청중 앞에 선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조셉 바이든 부통령과 검은 머리의 라티노 중년 여성과 함께 입장했다. 흑인 대통령과 백인 부통령 커플에 이어 사상 첫 라티노 대법관 후보를 발표하는 순간이었다. 이스트룸 단상에 흑인.백인.라틴계가 나란히 서있는 이례적 모습은 백악관에 이어 사법부의 최고 정점인 대법원도 인종적 다양성이 반영되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최초의 라티노 대법관 후보로 지명된 소니아 소토마요르(54)는 푸에르토리코 이민자의 딸로 '아메리칸 드림'의 대표적 케이스로 꼽힌다. 2차대전때 뉴욕으로 이주한 부친은 영어를 모르는 공장 노동자로 그녀가 9살때 세상을 떠났다. 간호사였던 어머니는 주 6일 근무하며 뉴욕 브롱스의 저소득층 주택가에서 소토마요르와 남동생을 키웠다. 교육이 모든 것을 가능케 한다는 점을 믿은 모친은 동네에서 유일하게 백과사전 전집을 자녀들에게 사줬으며 그녀를 천주교 사립학교에 다니게 했다. 8살때 소아 당뇨 진단을 받은 소토마요르는 친지.교사의 도움으로 프린스턴 대학에 장학생으로 진학 최우등으로 졸업했으며 예일대 로스쿨에서도 학회지 편집장을 맡았다. 오바마 대통령이 대법관 지명을 발표하는 단상 앞에는 소토마요르의 어머니가 의사로 성공한 아들과 함께 앉아 오랜 역경을 이기고 꿈을 성취한 순간 감정에 목이 메는 모습을 보였다. 소토마요르는 로스쿨 졸업후 뉴욕지방 검찰청과 로펌에 몸을 담았다가 조지 W.H. 부시 대통령에 의해 1991년 지방법원 판사로 지명됐다. 판사로 첫 임명될 때 상원에서는 무난히 인준을 받았지만 1997년 빌 클린턴 대통령에 의해 상급법원인 항소법원 판사로 지명됐을 때는 공화당 의원들의 반대로 1년 넘게 인준 절차가 지연되는 일도 있었다. 당시 공화당 의원들의 일부는 "라틴계는 대법관 후보가 될 수 없다"는 점을 들어 항소법원 판사 인준을 미뤘다. 이에대해 민주당 패트릭 레이히 의원은 "소수계 여성이라는 이유로 1년 넘게 인준절차를 미룬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라며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 제2순회 항소법원 판사로 재임중 소토마요르는 1994~95년 메이저리그(MLB) 선수노조의 파업으로 야구가 중단됐을 때 파업을 종식시키는 강제명령을 내린 것으로 유명하다. 소토마요르는 이 판결로 '야구 종목을 살려낸 판사'란 별명을 얻었다. 진보적 성향으로 분류되지만 지난해 코네티컷 뉴헤이븐시 당국이 소방대원 승진시험에서 "소수인종 가운데 승진요건에 해당하는 점수를 딴 사람이 없다"는 이유로 시험결과를 무효화한 조치에 대해 찬성하며 보수진영의 비판을 받았다. 공화당 의원들은 소토마요르의 상원 인준과정에서 이 사안을 집중적으로 물고 늘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한편 프린스턴대 재학중이던 1976년 결혼했으나 83년 이혼 지금까지 독신으로 지내고 있다. 봉화식 기자bong@koreadaily.com

2009-05-26

첫 라티노 대법관 후보 소토마요르…가난 극복한 아메리칸 드림

26일 오전 백악관의 이스트룸을 빼곡히 메운 청중 앞에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조 바이든 부통령과 까만 머리의 히스패닉 중년 여성을 대동하고 등장했다. 흑인 대통령과 백인 부통령이 미국 역사상 최초의 히스패닉 대법관 후보 지명을 발표하는 순간이었다. 이스트룸의 단상에 흑인과 백인, 히스패닉이 나란히 함께 서 있는 이례적인 모습은 백악관에 이어 미국 사법부의 최고 정점인 대법원까지도 인종적 다양성이 반영되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200년이 넘는 미국 대법원의 역사에서 히스패닉계 인물로는 최초의 대법관 후보에 지명된 소니아 소토마요르(54)는 푸에르토리코 이민자의 딸로 아메리칸 드림을 이뤄낸 전형적인 인물이다. 2차대전때 뉴욕으로 이주한 소토마요르의 아버지는 영어를 구사할 줄 모르는 공장노동자로 힘들게 일하다 소토마요르가 9살때 세상을 떠났다. 간호사였던 어머니는 주 6일 부지런히 일하며 뉴욕 브롱크스의 저소득층 주택가에서 소토마요르와 그의 남동생을 키워냈다. 훌륭한 교육이 모든 것을 가능케 한다는 점을 믿은 소토마요르의 어머니는 동네에서 유일하게 백과사전 전집을 자녀들에게 사줬으며 소토마요르를 가톨릭계 사립학교에 다닐 수 있도록 했다. 8살때 소아 당뇨 진단을 받았던 소토마요르는 꿈을 움츠리지 않고 친지와 교사의 도움으로 장학금을 받아 프린스턴대학에 진학해 최우등으로 졸업했으며 예일대 로스쿨에서는 학회지 편집장을 맡았다. 이날 오바마 대통령이 대법관 지명을 발표하는 단상 앞에는 소토마요르의 어머니가 의사로 성공한 아들과 함께 앉아, 역경을 이기고 아메리칸 드림을 성취한 소토마요르 가족의 일화를 소개하자 북받치는 감정에 목이 메는 모습을 보였다. 소토마요르는 로스쿨 졸업후 뉴욕지방 검찰청과 로펌에 몸을 담았다가 조지 W.H. 부시 대통령에 의해 1991년 지방법원 판사로 지명됐다. 판사로 첫 임명될 때 상원에서는 무난히 인준을 받았지만 1997년 빌 클린턴 대통령에 의해 상급법원인 항소법원 판사로 지명됐을 때는 공화당 의원들의 반대로 1년 넘게 인준 절차가 지연되는 일도 있었다. 당시 공화당 의원들의 일부는 나중에 소토마요르가 히스패닉계로 대법관 후보가 될 수 있다는 점을 들어 그의 항소법원 판사 인준을 미뤘다는 후문이다. 당시 민주당의 패트릭 레이히 의원은 히스패닉계 여성이라는 이유로 1년 넘게 인준절차를 미룬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라면서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 제2순회 항소법원 판사로 재임중 소토마요르는 1994∼95년 미 프로야구(MLB) 선수노조의 파업으로 야구경기가 중단됐을 때 파업을 종식시키는 강제명령을 내린 것으로 유명하다. 소토마요르는 이 판결로 ‘야구를 살려낸 판사’라는 별명을 얻었다. 전반적으로 중도 혹은 진보적 성향으로 분류되지만 지난해 코네티컷의 뉴헤이븐 시당국이 소방대원 승진시험에서 소수인종 가운데 승진요건에 해당하는 점수를 딴 사람이 없다는 이유로 시험결과를 무효화한 조치에 대해 손을 들어주면서 보수진영으로부터 맹렬한 비판을 받았다. 공화당 의원들은 소토마요르의 상원 인준과정에서 이 사안을 집중적으로 물고 늘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소토마요르는 프린스턴대학 재학중이던 1976년 결혼했으나 83년 이혼했다.

2009-0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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