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라티노 대법관 후보 소토마요르…가난 극복한 아메리칸 드림
26일 오전 백악관의 이스트룸을 빼곡히 메운 청중 앞에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조 바이든 부통령과 까만 머리의 히스패닉 중년 여성을 대동하고 등장했다. 흑인 대통령과 백인 부통령이 미국 역사상 최초의 히스패닉 대법관 후보 지명을 발표하는 순간이었다. 이스트룸의 단상에 흑인과 백인, 히스패닉이 나란히 함께 서 있는 이례적인 모습은 백악관에 이어 미국 사법부의 최고 정점인 대법원까지도 인종적 다양성이 반영되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200년이 넘는 미국 대법원의 역사에서 히스패닉계 인물로는 최초의 대법관 후보에 지명된 소니아 소토마요르(54)는 푸에르토리코 이민자의 딸로 아메리칸 드림을 이뤄낸 전형적인 인물이다. 2차대전때 뉴욕으로 이주한 소토마요르의 아버지는 영어를 구사할 줄 모르는 공장노동자로 힘들게 일하다 소토마요르가 9살때 세상을 떠났다. 간호사였던 어머니는 주 6일 부지런히 일하며 뉴욕 브롱크스의 저소득층 주택가에서 소토마요르와 그의 남동생을 키워냈다. 훌륭한 교육이 모든 것을 가능케 한다는 점을 믿은 소토마요르의 어머니는 동네에서 유일하게 백과사전 전집을 자녀들에게 사줬으며 소토마요르를 가톨릭계 사립학교에 다닐 수 있도록 했다. 8살때 소아 당뇨 진단을 받았던 소토마요르는 꿈을 움츠리지 않고 친지와 교사의 도움으로 장학금을 받아 프린스턴대학에 진학해 최우등으로 졸업했으며 예일대 로스쿨에서는 학회지 편집장을 맡았다. 이날 오바마 대통령이 대법관 지명을 발표하는 단상 앞에는 소토마요르의 어머니가 의사로 성공한 아들과 함께 앉아, 역경을 이기고 아메리칸 드림을 성취한 소토마요르 가족의 일화를 소개하자 북받치는 감정에 목이 메는 모습을 보였다. 소토마요르는 로스쿨 졸업후 뉴욕지방 검찰청과 로펌에 몸을 담았다가 조지 W.H. 부시 대통령에 의해 1991년 지방법원 판사로 지명됐다. 판사로 첫 임명될 때 상원에서는 무난히 인준을 받았지만 1997년 빌 클린턴 대통령에 의해 상급법원인 항소법원 판사로 지명됐을 때는 공화당 의원들의 반대로 1년 넘게 인준 절차가 지연되는 일도 있었다. 당시 공화당 의원들의 일부는 나중에 소토마요르가 히스패닉계로 대법관 후보가 될 수 있다는 점을 들어 그의 항소법원 판사 인준을 미뤘다는 후문이다. 당시 민주당의 패트릭 레이히 의원은 히스패닉계 여성이라는 이유로 1년 넘게 인준절차를 미룬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라면서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 제2순회 항소법원 판사로 재임중 소토마요르는 1994∼95년 미 프로야구(MLB) 선수노조의 파업으로 야구경기가 중단됐을 때 파업을 종식시키는 강제명령을 내린 것으로 유명하다. 소토마요르는 이 판결로 ‘야구를 살려낸 판사’라는 별명을 얻었다. 전반적으로 중도 혹은 진보적 성향으로 분류되지만 지난해 코네티컷의 뉴헤이븐 시당국이 소방대원 승진시험에서 소수인종 가운데 승진요건에 해당하는 점수를 딴 사람이 없다는 이유로 시험결과를 무효화한 조치에 대해 손을 들어주면서 보수진영으로부터 맹렬한 비판을 받았다. 공화당 의원들은 소토마요르의 상원 인준과정에서 이 사안을 집중적으로 물고 늘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소토마요르는 프린스턴대학 재학중이던 1976년 결혼했으나 83년 이혼했다.